좀비 드라마를 집중해서 본 것은 굉장히 오래간만입니다. 비교적 최근에 넷플릭스 블랙썸머, 주지훈 주연의 킹덤 정도를 감상했었네요.
나름 좀비 매니아로서 뽑는 최고의 작품은 2004년 새벽의 저주 리메이크 판입니다. 당시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충격을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는데요, 영화를 보던 중에 플레이타임이 너무 짧아서 슬픔에 빠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명작이지요.
그때 좀비 맛을 본 이후로 쿼런틴, 28주 후, 워킹데드 등으로 좀비물을 지속적으로 보아왔는데, 그중에서 '지금 우리 학교는'은 이제껏 본 좀비물 중에서 단연 손에 꼽히는 수작입니다. 시청 시간이 긴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제가, 작품을 연속으로 두 번 씩이나 정주행 하게 만든 작품은 이게 처음이었네요.
그만큼 웰메이드 드라마입니다. 해외 반응에서도 아실 수 있듯이, 굉장히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마스터피스라고 하기엔 조금 모자란 부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저도 상당히 많은 장면을 넘기면서 봤거든요. 또한 많은 비판글을 봤는데 거기에도 상당히 공감 가는 내용들이 많더라고요. 그런 소소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지우학은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는데, 그것은 좀비물 본질의 매력을 놓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좀비물의 기본 공식
지우학을 가장 재밌게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좀비물의 기본 공식에 충실하며 그 외 최근 좀비물의 단점을 대폭 줄인데 있습니다.
사실 좀비물에는 너무나 뻔한 공식이 있는데요, 오히려 그 공식 때문에 영화를 보게 됩니다. 대부분 좀비 영화에는 다음의 공식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좀비 등장 -> 대학살 -> 재정비 -> 결말
대체로 재난물들이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형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전개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은 바로 최초의 두 단계입니다. 좀비가 등장하고 그로 인해 학살이 일어나는 장면이죠. 내용의 특성상 빠르게 움직이게 되고 다양한 액션이 등장합니다. 짜릿하고 무서운 장면이 반복되지만 공포감보다는 쾌감에 가까운 스릴을 선사하죠. 좀비 영화의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장면의 등장입니다. 너무나 뻔하지만 어떤 영화에서든 절대 지겹지 않은 장면이죠.
여기서 관객들은 몰입하게 되며, 보통 90분짜리 플레이 타임의 영화에서 초반 10-20분 정도를 차지하게 됩니다. 대부분 영화의 가장 재미난 부분은 이 파트입니다(재미없게 만드는 거 자체가 힘든 구간입니다). 흥미진진하고 공격적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며, 여기서 끌어놓은 흥미를 연료삼아 마지막까지 영화를 보게 만들게 합니다.
이 장면이 지나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재정비'에 들어갑니다. 이는 좀비 떼들로부터 어렵사리 탈출한 주인공들이 안전한 공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전개되죠. 따라서 쉬어가는 구간이기도 하고, 결말을 향한 방향이 여기서 결정됩니다. 또한 좀비 외의 인물들 간의 갈등이 여기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작가의 여력에 따라 갈리지만 일반적으로 텐션이 떨어지며 지루해지기 쉽상인 장면입니다. 어정쩡한 신파나 캐릭터들의 발암을 일으키는 장면을 강제로 감상해야 되기도 하는 구간이죠.
보통 영화의 경우엔 이 장면이 크게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작품 전체를 피로 물들이기만 하는 대신 결말에 대한 개연성을 제공해야 하고, 또한 관객 또한 쉬어갈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플레이 시간이 긴 드라마의 특성상, 이 구간이 큰 문제로 작용합니다. 기본적으로 러닝타임을 늘여야 하는 드라마에서는 이 구간을 굉장히 길게 잡는 것이 보통이거든요. 따라서 이 구간은 철저하게 좀비가 배제된 인간들만의 구간이며, 굉장한 좀비 액션을 선호하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따분한 구간입니다.
이 구간의 가장 끔찍한 결과로는 워킹데드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좀비물임에도, 좀비는 점점 보기 힘들어지고 인간들 사이의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게 되죠. 따라서 서사는 늘어지게 되고 템포도 늘어지고 재미가 없어집니다 - 물론 당시에는 오히려 이것이 참신한 시도였지만 이 작품 이후로 대부분 좀비물들은 이런 식으로 전락해버리지 않았나 싶네요.
다행히도 곧 결말 구간으로 넘어가며 다시 한번 좀비 액션이 보이게 됩니다. 이제는 주인공들은 무방비 상태가 아닙니다. 계획이 준비되어있고, 무기가 준비되어있습니다. 도망치기보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담대함이 눈에 띄지요. 초반 대학살에 비해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곧 영화는 끝나게 되고 결말 역시 불분명하기 때문에 관객은 참고 끝까지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 끝.
기존 좀비물의 공식을 깬 타 작품들의 시도
사실 이런 좀비 영화의 기본적이고 뻔한 공식이 좀 지루해졌는지, 그동안 타 작품에서는 이 공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번 이루어졌었습니다. 좀비라는 매력적인 소재 자체는 유지하되, 너무나 뻔한 내용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였죠.
예를 들어, 지성의 가진 좀비의 등장이라던가, 좀비 자체가 주인공인 작품도 있었고, 좀비로 비즈니스를 한다거나, 좀비와의 이성교제도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식이죠.
이런 시도들은 참신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공통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이런 참신한 시도들은 그 시도 자체의 아이디어를 부각시키기 위해, 좀비물 본연의 가장 자극적이고 적나라한 장면이 배제되어버리기 쉽다는 겁니다. 즉 위의 좀비물 공식에서 가장 매력적인 초반 파트인 좀비가 출몰하는 장면이나, 학살 장면들이 통째로 스킵한 채로 영화가 시작되어 버리는 거지요. 즉 가장 급박한 스토리는 아주 짧게 요약되거나, 혹은 아예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스토리가 가장 루즈해지는 구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버리는 겁니다.
가장 최근에 본 좀비 영화는 넷플릭스의 "아미 오드 더 데드" 였는데요, 이 역시 새로운 좀비물의 실수를 그대로 따라왔습니다. 가장 재미난 장면인 좀비의 등장과 대학살을 초반 오프닝 크레딧 5분짜리로 축소시켜버리고, 좀비 대학살 후에 어느 정도 안전을 확보한 상태에서, 즉 가장 루즈한 시점에서 영화가 시작해버린 겁니다. 장황한 세계관과 인물 소개를 하는데 결국 한 시간 정도를 낭비해버리고, 제대로 좀비를 감상하지도 못한 채 도중에 영화를 꺼버린 기억이 있네요.
지우학은 어떤가? 정통적 좀비물에 충실한 작품
반면 지우학(지금 우리 학교는)의 경우 정통적인 좀비 공식에 충실합니다. 좀비로 인해 벌어지는 가장 급박적인 장면들이 드라마가 진행하는 내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제껏 좀비 드라마들이 시리즈물이라는 핑계로 루즈한 장면을 반복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지요.
다른 좀비 드라마들이, 좀비 출몰 -> 대학살 -> 재정비 -> 재정비 -> 재정비 -> 재정비의 시나리오라면,
지우학은, 좀비 출몰 -> 대학살 -> 재정비 -> 좀비 출몰 -> 대학살 -> 재정비 -> 좀비 출몰 -> 대학살 -> 재정비 -> 결말, 의 구조로 진행됩니다. 또한 사건이 학교에 한정되지 않고, 그 외 다양한 장소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그곳에서도 좀비 출몰 장면이 여러 번에 걸쳐 등장하게 되고 대학살 장면 역시 마찬가지로 반복돼서 끊임없이 흥미를 유발합니다. 즉, 좀비 물에서 가장 급박하고 재미난 장면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서 등장하는 거지요.
이것이 지우학이 좀비물 근본에 충실하며 가장 좋았던 부분입니다. 오직 생존이라는 포인트로 중점을 두고 끊임없이 좀비가 등장합니다. 2화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원테이크 씬의 맞먹는 흥분되는 장면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교실과 교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 때마다 좀비 액션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그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서 탈출하는 장면 역시 볼만합니다.
아마도 이런 구조가 가능했던 것은 탄탄한 원작 베이스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작 자체가 10년 전 작품이기 때문에 오히려 최근의 변질된 좀비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네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사실 군더더기가 좀 많이 보였습니다. 게다가 어느정도의 항마력을 요구합니다. 왜 굳이 이 캐릭터가 나오는 것일까, 굳이 이런 장면이 필요했을까, 싶은 부분들이 적잖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사실 원작에 없는 설정이나 캐릭터들은 이미 많은 분들께 비판을 받았지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사실 제가 크게 불만이 없었던 것은, 엄청나게 스킵하면서 봤거든요. 조금이라도 재미없어 보인다 싶으면 바로 오른쪽 방향키를 눌러댔습니다(온라인 스트리밍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심지어는 극 중에 키스신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정도니까, 무의식적으로 어지간히 스킵하면서 본거 같네요.
게다가 곳곳에 철학적 메시지가 담겨있는 거 같은데, 개인적으론 좀비물 보면서 깊이 생각하고 싶진 않더군요. 기본적으로 과학선생님 나올 때마다 다 넘겼고, 학생들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흐를 때마다 키보드를 눌러서 넘겼습니다. 분명히 불필요한 장면들이 적잖게 있었던 거 같습니다. 사실 이런 이유로 마스터피스라고는 불리긴 어려운 작품인 거 같습니다. 2,3화 정도 분량을 줄였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여러번 들었지만, 그래도 제가 넘겼던 부분들을 좋아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거 같더라고요.
그럼에도 수작인 이유는
이미 언급한 장점들이 그 많은 단점들을 엎어버린 거죠. 여러 가지 불필요한 요소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럼에도 좀비물의 본질을 잃지 않고 끝까지 유지했던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불필요한 장면은 손가락으로 넘겨볼 수 있는 게 넷플릭스 유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큰 단점으로 다가오지 않고, 관대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론 배우들의 합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박지후 윤창영의 조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고요, 특히 윤창영 님의 담담한 말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박지후 님도 나중에 관심이 생겨서 이전 작품인 벌새를 감상해봤는데 그 영화 보고 완전 팬이 돼서 앞으로도 활동도 기대되네요. 또한 조이현 로몬의 조합은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왜냐하면 좀비 위주로 보느라), 두 번째 정주행 때 봤을 때 소소한 재미들을 많이 안겨줬네요. 특히 조이현 님 관심 생겨서 영상 몇 개를 찾아봤는데 영화와는 정반대의 성격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그 외에 오준영 역할을 맡은 안승균 님이 기억에 남네요.
마치며
사실 '지금 우리 학교는'이 장르물이다 보니까 호불호가 굉장히 갈릴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좀비물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반드시 보시기를 권장합니다. 저도 덕분에 재미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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